‘야당 도시 인천’ 지금은 그 빛깔조차 흐릿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을 일컫던 이 명칭은 개항 이후 계속돼 온 민초들의 저항 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특히 식민지 시대에 빈발했던 근로자들의 노동 쟁의는 저항 의식 배양의 중요한 모태가 되었다. 당시 발행된 신문과 전문가들은 일제하 인천 지역의 노동 쟁의를 ‘항구 도시와 공업 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연일 전개되는 항상적인 현상이었고, 자본가와의 대결뿐 아니라 일제와의 대결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인천항에서의 양곡선적
조선인 노동 모습
식민지 시대 인천 지역의 근로자들이 끊임없이 노동 쟁의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탄압이라는 요인 이외에도 입지적인 면과 함께 당시 한국인의 경제적인 실태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인천은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지역보다도 일찍이 노동자 계층이 형성됐다. 여기에 수도 서울에 인접해 있다는 입지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본 상인들의 진출이 많았고 이에 따른 경제적 과점과 수탈이 커서 시민들의 어려움과 불만이 컸다.
개항 이후 산발적이며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던 인천 지역의 노동 운동은 1920년 노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가 설립되면서 처음으로 조직화의 중요성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가 상호 부조와 계몽적 활동을 중시한 관계로 당시의 조직 활동은 친목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1924년 인천노동총동맹이 결성되자 지역 내 노동 운동은 드디어 일제 및 기업가와의 투쟁이라는 노동 운동 본연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인천소성노동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천노동총동맹은 결성과 함께 산하 조직 확대와 더불어 근로자들의 권익 옹호에 주력했다. 이 결과, 업종별 노조의 결성이 잇따랐고 그 수도 192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10여 개에 달했다. 당시 인천노동총동맹에 가입한 대표적인 업종별 조합으로는 정미직공조합(설립 연도 미상), 인천인쇄직공동맹(1924년 6월 설립), 인천두부판매업조합(1924년 12월 29일 설립), 인천철공조합(1925년 1월 11일 설립), 인천청년 노동조합(1926년 8월 25일 설립), 인천노우회(1926년 9월 28일 설립), 인천목공조합 (1925년 11월 15일 설립), 양재직공조합 (1928년 6월 24일 설립) 등이 있다.
노동자 기숙소 자비원
이들 업종별 노조 중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은 정미 업종이었다. 인천항이 일본으로의 쌀 수출이 많았던 항구였기에 정미업은 당시 인천 경제에 대한 비중이 80%에 이를 정도로 주력 산업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했던 정미 직공과 선미 직공들의 생활상은 매우 비참했다.
쌀을 고르는 선미 직공들은 휴일 없이 1일 평균 10시간 노동에 평균 임금이 35전에 불과했다. 이마저 기계의 도입으로 실직에 대한 공포감까지 겹치면서 생활은 형용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런 선미 직공들의 생활을 ‘눈물과 피를 긁어 먹는 정미소' 라는 표현으로 고발하고 있다. 비참한 생활과 경영진들의 횡포에 대한 정미, 선미 직공들의 불만은 자연스레 집단 행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미소 노동 쟁의는 가등정미소, 역무정미소를 비롯해 지역 내에 있는 일본인 소유 정미소가 주 진원지였지만 주명기가 경영하던 조선정미(주)를 위시한 한국인 소유의 정미소에서도 노사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정미업계의 노동 쟁의가 1920년대 지역 내 노동 운동을 주도했다. 이처럼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시민들의 불만을 대변한 탓에 시민들의 성원 속에서 성장하던 인천 지역의 노동 운동은 1928년을 전후해 일제의 탄압과 회유로 내분의 진통을 겪는다.
1920년대 전반기까지 지역 노동 운동을 주도해 온 정미 업종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반면 부두 근로자들이 노동 운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투쟁은 오히려 강경해졌고 인천 부두는 당시 한국 노동 운동의 메카로 떠올랐다. 이는 일제의 수탈이 강화되고 전쟁 수행을 위해 부두의 중요성이 커진데다 부두의 특성상 참여 근로자가 많고 종사자의 대부분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탄압기 인천 부두 근로자들의 대표적인 파업 투쟁으로는 1935년 6월에 발생한 총파업을 들 수 있다. 선박 운임 문제로 노동자들의 취업을 위협한 일제 예속 자본가들을 반대하여 발생한 이 파업에서 근로자들은 경찰이 파업 조정에 순응하게 하려고 시도한 조합 상층부들의 배신 행위를 규탄하고 파업 파괴 분자들을 습격하는 한편 진압에 나선 경찰에 거세게 항거했다. 부두 근로자들의 이 같은 투쟁에 못지않게 인천의 명물 성냥 공장의 노동 쟁의도 1930년대 인천 노동 운동을 주도했던 한 축이었다.
1920년 말부터 단체 행동에 본격 나섰던 인천 성냥 공장 근로자들은 1931년 파업에서 승리를 쟁취하자 1932년 들어 금곡리(금곡동) 공장과 송림정(송림동) 공장이 경영주의 횡포에 항거해 동시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에 참여했던 성냥 공장 근로자들은 정미 업계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2주일 만에 무조건 업무에 복귀하기로 하고 해산됐다.
그러나 이는 지역 내에서 최초로 발생된 동종 업계의 동맹 파업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 지역의 노동 운동은 암울한 식민지 말기에도 지하에 둥지를 틀고 마지막까지 일제에 항거했다. 이에 따라 광복 이후에는 한국 노동 운동의 중심체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노동운동의 메카
‘야당 도시 인천’ 지금은 그 빛깔조차 흐릿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을 일컫던 이 명칭은 개항 이후 계속돼 온 민초들의 저항 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특히 식민지 시대에 빈발했던 근로자들의 노동 쟁의는 저항 의식 배양의 중요한 모태가 되었다. 당시 발행된 신문과 전문가들은 일제하 인천 지역의 노동 쟁의를 ‘항구 도시와 공업 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연일 전개되는 항상적인 현상이었고, 자본가와의 대결뿐 아니라 일제와의 대결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인천항에서의 양곡선적
조선인 노동 모습
식민지 시대 인천 지역의 근로자들이 끊임없이 노동 쟁의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탄압이라는 요인 이외에도 입지적인 면과 함께 당시 한국인의 경제적인 실태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인천은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지역보다도 일찍이 노동자 계층이 형성됐다. 여기에 수도 서울에 인접해 있다는 입지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본 상인들의 진출이 많았고 이에 따른 경제적 과점과 수탈이 커서 시민들의 어려움과 불만이 컸다.
개항 이후 산발적이며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던 인천 지역의 노동 운동은 1920년 노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가 설립되면서 처음으로 조직화의 중요성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가 상호 부조와 계몽적 활동을 중시한 관계로 당시의 조직 활동은 친목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1924년 인천노동총동맹이 결성되자 지역 내 노동 운동은 드디어 일제 및 기업가와의 투쟁이라는 노동 운동 본연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인천소성노동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천노동총동맹은 결성과 함께 산하 조직 확대와 더불어 근로자들의 권익 옹호에 주력했다. 이 결과, 업종별 노조의 결성이 잇따랐고 그 수도 192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10여 개에 달했다. 당시 인천노동총동맹에 가입한 대표적인 업종별 조합으로는 정미직공조합(설립 연도 미상), 인천인쇄직공동맹(1924년 6월 설립), 인천두부판매업조합(1924년 12월 29일 설립), 인천철공조합(1925년 1월 11일 설립), 인천청년 노동조합(1926년 8월 25일 설립), 인천노우회(1926년 9월 28일 설립), 인천목공조합 (1925년 11월 15일 설립), 양재직공조합 (1928년 6월 24일 설립) 등이 있다.
노동자 기숙소 자비원
이들 업종별 노조 중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은 정미 업종이었다. 인천항이 일본으로의 쌀 수출이 많았던 항구였기에 정미업은 당시 인천 경제에 대한 비중이 80%에 이를 정도로 주력 산업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했던 정미 직공과 선미 직공들의 생활상은 매우 비참했다.
쌀을 고르는 선미 직공들은 휴일 없이 1일 평균 10시간 노동에 평균 임금이 35전에 불과했다. 이마저 기계의 도입으로 실직에 대한 공포감까지 겹치면서 생활은 형용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런 선미 직공들의 생활을 ‘눈물과 피를 긁어 먹는 정미소' 라는 표현으로 고발하고 있다. 비참한 생활과 경영진들의 횡포에 대한 정미, 선미 직공들의 불만은 자연스레 집단 행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미소 노동 쟁의는 가등정미소, 역무정미소를 비롯해 지역 내에 있는 일본인 소유 정미소가 주 진원지였지만 주명기가 경영하던 조선정미(주)를 위시한 한국인 소유의 정미소에서도 노사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정미업계의 노동 쟁의가 1920년대 지역 내 노동 운동을 주도했다. 이처럼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시민들의 불만을 대변한 탓에 시민들의 성원 속에서 성장하던 인천 지역의 노동 운동은 1928년을 전후해 일제의 탄압과 회유로 내분의 진통을 겪는다.
1920년대 전반기까지 지역 노동 운동을 주도해 온 정미 업종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반면 부두 근로자들이 노동 운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투쟁은 오히려 강경해졌고 인천 부두는 당시 한국 노동 운동의 메카로 떠올랐다. 이는 일제의 수탈이 강화되고 전쟁 수행을 위해 부두의 중요성이 커진데다 부두의 특성상 참여 근로자가 많고 종사자의 대부분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탄압기 인천 부두 근로자들의 대표적인 파업 투쟁으로는 1935년 6월에 발생한 총파업을 들 수 있다. 선박 운임 문제로 노동자들의 취업을 위협한 일제 예속 자본가들을 반대하여 발생한 이 파업에서 근로자들은 경찰이 파업 조정에 순응하게 하려고 시도한 조합 상층부들의 배신 행위를 규탄하고 파업 파괴 분자들을 습격하는 한편 진압에 나선 경찰에 거세게 항거했다. 부두 근로자들의 이 같은 투쟁에 못지않게 인천의 명물 성냥 공장의 노동 쟁의도 1930년대 인천 노동 운동을 주도했던 한 축이었다.
1920년 말부터 단체 행동에 본격 나섰던 인천 성냥 공장 근로자들은 1931년 파업에서 승리를 쟁취하자 1932년 들어 금곡리(금곡동) 공장과 송림정(송림동) 공장이 경영주의 횡포에 항거해 동시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에 참여했던 성냥 공장 근로자들은 정미 업계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2주일 만에 무조건 업무에 복귀하기로 하고 해산됐다.
그러나 이는 지역 내에서 최초로 발생된 동종 업계의 동맹 파업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 지역의 노동 운동은 암울한 식민지 말기에도 지하에 둥지를 틀고 마지막까지 일제에 항거했다. 이에 따라 광복 이후에는 한국 노동 운동의 중심체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