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근대 문화로 읽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 - 경제화와 고무신

김병섭
20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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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화와 고무신 



경제화 신문기사


 지금은 우리 생활에서 멀어져 간 고무신에 대해 대부분이 한말 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이 1919년 서울에 설립했다는 대륙고무를 최초의 생산처로 기록한다. 물론 이하영의 첫 제품은 순종 임금이 신었다는데 그것은 1922년의 일이다. 그밖에도 1921년 김성수의 중앙상공주식회사, 고중희의 반도고무공업소, 1922년 이후 김연수가 만들었다는 별표 고무신 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형 고무신을 창조해 낸 원조는 분명히 인천일 것이다. 그리고 고무신이 탄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견본 역할을 했던 것 역시 인천에서 발명된 경제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우리나라에 가죽 구두가 널리 보급되면서 인천 경동에 삼성태라는 양화점이 문을 연다. 그러나 당시의 구두는 한 켤레 값이 무려 쌀 두세 가마와 맞먹는 엄청난 고가품이었다. 여기서 삼성태의 주인 이성원이 착안한 것이 누구나 신을 수 있는 값싸고 질 좋은 짚신 대용 신발이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바닥은 가죽, 등 쪽은 우단이나 천막 천을 댄 오늘날의 남자 고무신 형태의 경제화였는데 한복 버선발에도 잘 어울리고 신고 벗는 데도 아주 편리한, 이름 그대로 매우 실용적인 신이었다. 


고무신


 한편, 1918년 인천에 정착해 용동에서 식료품점을 하던 안기영은 일본 고베에서 판촉차 한국에 온 고무신 업자를 만나 호모화라는 구두 모양의 일본 고무신을 보게 된다. 서울에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안기영의 머리 속에는 언뜻 스치는 게 있었다. 안기영은 그 일본인에게 마른신과 삼성태의 경제화 모양대로 두 가지의 고무신을 만들 것을 주문한다. 얼마 후 고베에서 마른신 모양의 여자 신발과 경제화 모양의 남자 신발이 도착했다. 경향 각지에서 참으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성원의 슬기로움과 안기영의 선구적 착상이 어우러져 최초의 값싼 한국형 고무신이 인천 땅에 탄생한 것이다. 

 이하영의 대륙고무는 이런 내막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설립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인천 율목동에 상당한 땅과 별장을 소유했던 권신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안기영의 고무신은 인천 기업으로서 오래 남지 못했다. 


 • 경제화와 고무신 경제화가 널리 인기를 끌다보니 이와 관련한 특허권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인천에서 경제화 장사를 하던 합순태주동건이란 자가 이미 세상에 널리 퍼진 혁신화나 경제화라는 것을 개량하여 '죠션화라고 실용신안의 등록을 밧아 그 이익을 독점하고자하였’ 지만 특허국에서 무효로 처리했다는 기사를 통해서도 고무신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인천향토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나타난다. '태’ 표 고무신공장은 1928년 10월 고무신상인 안종필 씨가 개인 창업과 관련하여 오로지 고무신 제조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29년 8월 안종필 씨가 죽은 뒤 자본금 5만원의 합자조직으로 한문원 씨를 총지배인으로 해서 사업을 계승하여 고무신 외에 최근 방수용구 및 그 재료의 제조를 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공장은 아직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아도 근래 조선 내에서 고무신에서 방수용구로 용도를 광범위시켜 해마다 그 수요가 증대되고 있다. (공장소재지 : 인천부 금곡리 42번지, 명칭 및 대표자 : 인천고무합자회사 안종만, 창립 : 192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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