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인천 경동에 있던 협률사라는 설이 있다. 즉 어디서 근거한 것인지 1895년 개관설이 그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1902년 서울의 협률사보다도 무려 7년이나 빠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고증할 근거가 전혀없다.
『개항과 양관 역정』에는 “신세기 1900년에 들어섰을 무렵 이미 인천에는 상설 극장 2개소가 있었다고, 그 당시 내리 예배당 목사를 하고 있던 미국인 존스 철학박사는 소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 인천 경동의 협률사에 대해 개관 연도와 일자를 밝히지 않은 채 “그 당대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가 운영하던 협률사라는 연극장이 있었다. 협률사는 오늘의 애관의 전신으로서, 일청전쟁중 (1894~95) 지었던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하였는데...” 라고만 하고 있다.
또 『인천석금』에도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는 예전에는 떠꺼머리 총각 엿장수였다. 그는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해 와 성공한 재산가이다. 일본말 하는 사람이 귀하던 시절에 이에 능통한 외지인으로서 일본인과 결탁한 실업가이다. 그는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 집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극장 '협률사' 이다. 당시에는 남사당패 또는 굿중패가 흥행계의 주역이었다. 인형극 박첨지, 흥부놀부, 땅재주와 줄타기, 무동타기, 승무도 있었고 성주풀이가 공연되기도 했다. 그래서 극단도 협률사라 한 것 같다.”는 기록만 남긴다.
문제는 여기서 “그래서 극단도 협률사라고 한 것 같다.”는 말투인데 이것은 이미 서울의 협률사를 정치국이 염두에 두고 자기의 극장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정치국은 1899년 2월까지는 부산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1899년 2월 18일 『황성신문』의 기사를 보면 협률사는 분명 그 이후에 문을 연 극장이 된다. 다만 1900년에 문을 열었다고 해도 서울의 협률사보다는 2년이 빠른 셈이나 그런 증거가 없다.
협률사 기사
애관극장
기록에 의거한 인천 최초의 극장은 인천좌로 알려져 있다. 인천좌는 중구 송학동 2가 옛 다비다모자원(현 인성여중 건물 자리) 자리에 있었던 목조 단층의 작은 연회장이었다. 이 극장은 주로 일본인들의 오락장으로서 그리 길게 지속되지는 못했다.
• 협률사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연희가 서구식 극장 공간 속에 편입되기 시작 한 것을 협률사 시기(1902. 8 - 1906. 4)라 한다. 협률사는 고종의 등극 40주년 칭경예식에 참석하게 될 외국의 귀빈을 대접하려고 신식 설비를 갖추는 가운데 봉상시의 일부를 터서 만든 극장이며, 그 예행연습장 겸 관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예식은 1902년 9월 17일(음력)이 예정일이었지만 콜레라의 유행과 영친왕의 두후, 그리고 흉년이 들어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8월 6일에 이르러 명색만 갖춘 예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건 `협률사는 최초의 극장구조를 갖춘 국립극장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닌` 다고 한다. 하지만 봉상부제조 이필화가 1906년 4월 9일 협률사가 나라의 풍속을 망치고 국민들의 심신을 흐리게 한다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건의함에 따라 4월 말 폐지되고 만다.
참고로 협률사는 폐지되었지만 그 '협률사' 라는 명칭은 오랫동안 극장이나 전통적인 연희를 하는 집단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협률사와 애관극장
표관
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인천 경동에 있던 협률사라는 설이 있다. 즉 어디서 근거한 것인지 1895년 개관설이 그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1902년 서울의 협률사보다도 무려 7년이나 빠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고증할 근거가 전혀없다.
『개항과 양관 역정』에는 “신세기 1900년에 들어섰을 무렵 이미 인천에는 상설 극장 2개소가 있었다고, 그 당시 내리 예배당 목사를 하고 있던 미국인 존스 철학박사는 소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 인천 경동의 협률사에 대해 개관 연도와 일자를 밝히지 않은 채 “그 당대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가 운영하던 협률사라는 연극장이 있었다. 협률사는 오늘의 애관의 전신으로서, 일청전쟁중 (1894~95) 지었던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하였는데...” 라고만 하고 있다.
또 『인천석금』에도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는 예전에는 떠꺼머리 총각 엿장수였다. 그는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해 와 성공한 재산가이다. 일본말 하는 사람이 귀하던 시절에 이에 능통한 외지인으로서 일본인과 결탁한 실업가이다. 그는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 집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극장 '협률사' 이다. 당시에는 남사당패 또는 굿중패가 흥행계의 주역이었다. 인형극 박첨지, 흥부놀부, 땅재주와 줄타기, 무동타기, 승무도 있었고 성주풀이가 공연되기도 했다. 그래서 극단도 협률사라 한 것 같다.”는 기록만 남긴다.
문제는 여기서 “그래서 극단도 협률사라고 한 것 같다.”는 말투인데 이것은 이미 서울의 협률사를 정치국이 염두에 두고 자기의 극장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정치국은 1899년 2월까지는 부산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1899년 2월 18일 『황성신문』의 기사를 보면 협률사는 분명 그 이후에 문을 연 극장이 된다. 다만 1900년에 문을 열었다고 해도 서울의 협률사보다는 2년이 빠른 셈이나 그런 증거가 없다.
협률사 기사
애관극장
기록에 의거한 인천 최초의 극장은 인천좌로 알려져 있다. 인천좌는 중구 송학동 2가 옛 다비다모자원(현 인성여중 건물 자리) 자리에 있었던 목조 단층의 작은 연회장이었다. 이 극장은 주로 일본인들의 오락장으로서 그리 길게 지속되지는 못했다.
• 협률사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연희가 서구식 극장 공간 속에 편입되기 시작 한 것을 협률사 시기(1902. 8 - 1906. 4)라 한다. 협률사는 고종의 등극 40주년 칭경예식에 참석하게 될 외국의 귀빈을 대접하려고 신식 설비를 갖추는 가운데 봉상시의 일부를 터서 만든 극장이며, 그 예행연습장 겸 관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예식은 1902년 9월 17일(음력)이 예정일이었지만 콜레라의 유행과 영친왕의 두후, 그리고 흉년이 들어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8월 6일에 이르러 명색만 갖춘 예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건 `협률사는 최초의 극장구조를 갖춘 국립극장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닌` 다고 한다. 하지만 봉상부제조 이필화가 1906년 4월 9일 협률사가 나라의 풍속을 망치고 국민들의 심신을 흐리게 한다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건의함에 따라 4월 말 폐지되고 만다.
참고로 협률사는 폐지되었지만 그 '협률사' 라는 명칭은 오랫동안 극장이나 전통적인 연희를 하는 집단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현) 애관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