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근대 문화로 읽는 '한국 최초 인천 최고' - 깜짝 놀라게 했던 오포

김병섭
20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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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라게 했던 오포



 오포는 정오포의 준말이다. 포를 쏘아 정오의 신호로 삼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겼는데 시보time signal라고도 한다.

 인천이 개항장으로 많은 재화와 인물 군상들이 몰려 있던 시기에 표준 시간, 즉 기준이 되는 시간을 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표준 시간을 알리는 시계나 제도가 없어 심지어 재판 시간에도 많은 차질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매주 토요일 정오에 포를 발사해 줄 것을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자국의 청휘함 함장에게 건의하며 일본 해군성에 조회를 의뢰한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해에 오포 발사가 이루어진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렇게 처음으로 오포 발사가 거론된 후, 기록에는 1906년 2월 7일 2~3발을 시험 발사한 후 9일부터 정식으로 오포를 실시했다고 되어 있다. 일본시간 정오 12시에 맞추어 한국의 오전 11시에 포를 쏘았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 1871년 7월 12일 와카야마한에서 오포를 쏘았다고 한다. 『인천석금』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참고가 된다.

 “1908년경 일본인 인천거류민단은 관측소(인천측후소)에 시보를 위촉했다. 그러나 관측소에는 지금처럼 사이렌 같은 음향 신호 기구가 없는 데다가, 일본인 거주지 부근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포성으로 때를 알리는 것이 효과적이며 경제적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응봉현 산허리에 대포를 걸어 실탄 없는 공포를 쏘아 정오를 알리게 한 것이 인천시보의 시작인 것이다. 


싸이렌탑


 이 대포는 아마 러일전쟁 때 쓰던 헌 대포였는지 전시에는 사용하지 못할 폐물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화약을 집어넣고 자귀향에 불을 대어 줄을 잡아당겨 터뜨리는 아주 느리고 장난 같은 장치였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관측소 오포에 이상이 생겼다. 고색창연한 무기로 포를 쏘던 기상대의 시보는 전국적인 신뢰를 가졌으나, 포신이 고장 나 시각을 어기게 되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관측소 오포수는 전문가가 아니고, 고용인들이었다. 그들은 정각 전에 대기하고 있다가 명령을 받아 포를 쏘았는데 그 날따라 오포수 가또오가 줄을 잡아 당겨도 대포가 터지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포 구멍에 꼬챙이를 집어넣고 쑤셔 보기도 하고, 자귀향도 두들겨 보기도 했는데 그만 탕! 하고 터지는 바람에 그는 공깃돌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시각은 맞지 않았지만, 터지기는 터졌다. 이 사고는 그의 책임이 아니고, 대포 고장이란 것 때문에 그는 벌보다 칭찬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 불의의 폭발 사고로 그는 왼편 손가락 다섯이 모두 없어지고, 오른편 손가락은 단지 두 개만 남는 병신이 되었다. 향토 시민 중에 화평동 조막손이 전당포 주인이 바로 그 오포수 가또오라는 것을 아는 분은 드물 것이다.” 

 1923년 12월 인천 오포가 폐지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유는 인천부가 오포 발사에 따른 경비를 충당하기에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오포 비용은 1,103원인데 이 중에서 1,000원의 경비도 마련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폐지가 안 된 것은 “경비는 만타하야도 도시톄면 [도시 체면] 보아서” 였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오포 실시는 1884년 6월 서울 금천교에서 발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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